00:00
00:00

 백범 김구 연보


●  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(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)에서 빈농의 김순영의 외아들로 태어남.  어머니는 곽락원이며 당 17세. 아명은 창암.
●  1879년 천연두를 앓음.
●  1880년 집안이 강령 삼거리로 이사하다.
●  1884년 조부상을 당함. 국문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다.
●  1887년 집에 서당을 만들고 이생원을 초빙하여 한문 공부를 하다.
●  1889년 "통감", "사략" 등의 병서를 읽음.
●  1890년 학골 정문재의 서당에서 "당시", "대학", "과문" 등을 배우다.
●  1892년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매관매직의 타락한 과거에 실망.  그 후 풍수와 관상공부 등을 했고, 병서를 탐독함.
    동학에 입도한 후 이름을 창수라 개명함.
●  1893년 황해도 도유사의 한 사람으로 뽑혀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를 만남.
●  1894년 팔봉접주로서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략했으나 실패.
●  1895년 신천 안태훈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했고, 그의 아들 소년 안중근을 만남.
●  당시에 명망이 높은 해서 거유 고능선의 지도를 받음. 압록강을 건너가 김이언이 지휘하는 의병대에 참가.
●  1896년 2월,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 군사 간첩 토전양량을 죽여 국모의 원한을 품음.  
   5월 2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인천 감영에 투옥됨. 감옥에서 "태서신사", "세계지지" 등을 읽고 신학문에 눈뜸.
●  1897년 7월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명으로 사형 직전에 특사령이 내려짐.
●  1898년 3월 9일 밤 탈옥, 전국을 방랑하다가 공주 마곡사의 계를 받음.
●  1899년 잠시 주지승으로 부임되었다가 다시 환속하여 고향에 돌아옴.
●  1900년 김두래란 이름으로 변명하고 다시 방랑길에 오름.
●  1901년 12월 9일 엄친 김순영씨 세상을 떠남.
●  1902년 장연 친척집에서 여옥이라는 처녀와 약혼함.
●  1903년 여옥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기독교에 입교함. 안창호의 영매 신호와 약혼했으나 파혼.
●  1904년 신천 사평동 최준례와 결혼함.
●  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준. 이동녕 등과 함께 구국운동에 앞장섬.
●  1906년 해서 교육회 총감이 되어 학교 설립을 적극 추진함.
●  1907년 장녀 화경 출생.
●  1908년 신민회를 통하여 구국운동에 앞장 서는 한편,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움.
●  1909년 전국의 강습소를 순회하였고, 재령 보강학교의 교장이 됨.  
​​​​​​​   10월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좌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됨.
●  19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신민회 비밀회의에 참석함.
●  1911년 1월 5일 사내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안명근 사건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언도 받음.
●  1913년 옥중에서 이름을 구, 호를 백범이라 함.
●  1914년 감형으로 7년의 형기를 끝내고 7월에 가출옥함.
●  1916년 출옥 후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관리인으로 있으면서 농촌계몽운동에 힘씀.
●  1917년 장남 인 출생함.
●  1919년 3.1 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 됨.
●  1922년 차남 신이 상해에서 태어남.
●  1923년 임시정부 내무국장에 취임.
●  1924년 1월 1일 상해에서 부인 최여사 폐렴으로 세상을 떠남.
●  1926년 12월 임시정부의 원수인 국무령에 취임.
●  1927년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쳐 국무위원에 취임
●  1928년 자서전 "백범일지" 상권의 집필을 시작함. 3월 이동녕, 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.
●  1929년 5월 자서전 "백범일지" 탈고함. 재중 거류민단장을 겸임.
●  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, 그 단장이 되어 독립투사를 양성.
●  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일황 저격에 실패함. 4월 29일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지게 함.
●  1933년 윤의사 의거 후 신변이 위험해지자 강소성 가흥으로 피신. 가흥에서 주애보라는 여사공에게 몸을 의탁함.  
​​​​​​​   중국의 장개석 장군을 만나 친교를 맺고, 낙양 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할 것을 결정.
●  1934년 다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함.
●  1935년 11월 가흥에서 임시의정원 비상회의를 열어 기구를 강화.
●  1936년 이동녕 등의 동지들과 한국국민당을 창당함.
●  1937년 임시정부를 진강에서 장사로 옮김.
●  1938년 민족주의 3당 통합문제를 논의하던 남목청에서 조선 혁명당원 이운한의 총격을 받아 1개월 동안 입원 치료함.
●  1939년 다시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취임. 어머니 곽씨부인 인후염으로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.
●  1940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로 갔다가 장개석 주석의 도움으로 다시 중경으로 감.  
​​​​​​​   5월 혁명 투쟁 각 단체를 통합, 한국독립당에 집중케 하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함.  군사특파단을 협서성 서안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노력.
●  1941년 12월 9일 임시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함.
●  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 정부 사이에 광복군에 대한 정식 협정이 체결 공포됨.
●  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연합군과 공동 작전에 진력하게 됨.
●  1944년 2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주석으로 재선됨. 협 서성 서안과 안취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고 미군의 원조로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기술 훈련을 적극 추진 지휘.
●  1945년 2월 임시정부는 일본군과 독일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함. 장남 인 호흡기병으로 세상을 떠남.
​​​​​​​    11월 2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 일동과 개인 자격으로 환국함.  
​​​​​​​   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보고 12월 28일 이후 반탁 국민운동을 적극 추진.
●  1946년 2월 비상국무회의가 조직되어 그 총리에 취임함. 인천. 마곡사 등 전국을 순회.  
​​​​​​​   윤봉길, 이봉창, 백정기 3의사의 유골을 효창공원에 봉안함.
●  1947년 1월 비상국민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그 부주석에 취임함.  
​​​​​​​   2차 미, 소 공동위원회가 열리자 반탁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.  
​​​​​​​   11월 유엔 감시하의 남북 선거에 의한 정부수립 결의안을 지지함. 그의 정치 이념을 표현한 '나의 소원'을 발표.
●  1948년 2월 20일 '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'을 발표함.  
​​​​​​​   4월 19일 남북 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감.
​​​​​​​    5.10 선거 후부터는 건국실천원양성소에 힘을 기울임.
●  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함.  
​​​​​​​​​​​​​​   7월 5일 거족적인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영면함.
●  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이 수여됨.

다른 화

목록보기